자기 자신을 정복한 우리의 위대한 멘토
아우렐리우스는 황제라는 직위나 정복자로서의 자질 또는 그로 인해 훗날 듣게 될 자자한 명성에 연연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존중했다. 노예 신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은 황제였던 아우렐리우스. 그에게 최고 통치자라는 명성은 평온한 영혼의 방해물일 뿐이었다.
사후의 명성을 염려하는 자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도 모두 곧 죽고 그다음 세대도 죽을 것이며,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에 대한 기억도 타올랐다 꺼져버리는 인간들에 의해 이어지다가 완전히 꺼져버릴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불멸이고, 따라서 너에 대한기억이 불멸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도대체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칭찬이 죽은 자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산 사람에게도 부차적인 이익 외에 무엇이란 말인가? 너는 후세 사람들의 평판에 매달림으로써 지금 때아니게 자연의 선물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행복, 선, 욕망만을 지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학문을 게을리한 적이없다. 로마 제국 변방에서 전쟁을 지휘하면서도 철학적으로 보다 성숙해지기 위해 사색에 사색을 거듭했으며, 자신의 태만을 무시하지도 즐기지도 않았다. <명상록>의 뒷부분에는 마치 수도자의 득도 장면을 연상시키는 장엄한 메모가 나온다. 나 자신을 정복하는 것은 어쩌면 세상을 정복하는 것보다 어렵고 위대한 일이 아닌가.
오늘 나는 모든 방해에서 벗어났다. 아니, 모든 방해를 내던져버렸다. 왜냐하면 방해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 판단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1월. 초겨울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나목들이 거리거리에 저 홀로 외롭다. 그 나목들을 지나쳐 걷는 세상의 인간들이 재촉하는 발걸음만 분주하다. 하지만 정말 외롭고 분주한 것은 아우렐리우스의 메모처럼 내 안에, 내 판단 안에 있는 방해꾼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고 죽는 것이, 그리고 피고 지는 것이 수레바퀴처럼 처음과 끝이 없거늘, 죽고 지는 것이 나고 피는 것과 가름이 있을 리는 없다. 저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나목은 이미 단단한 싹을 준비하고 있을진대, 외롭고 분주한 것은 우리의 앙상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어느 아우렐리우스 평전의 부제를 보니 저자는 그를 '위대한 멘토'라 칭했다. 세상일이야 언제나 통솔하거늘. 거기서 무슨 승부다운 승부를 보고자 11월 낙엽 깔린 길바닥에서 수선을 떠는가. 2,000년이 지나도 역사나 위대한 멘토인 아우렐리우스처럼 우리 자신과의 진검 승부를 위해 전가의 보검을 꺼내자. 그리고 전장의 폭풍 전야 깊거들랑 막사에 홀로 앉아 <명상록>을 읽으며 위대한 멘토의 가르침을 따르자.
"오늘 나는 모든 방해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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