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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16. 11:41 여러가지

민중의 광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은 광장으로서의 역할도 병행했다.

시장만큼 각종 정보와 소식, 풍문이 빠르게 전달되는 곳은 없었다.

꼭 사거나 팔 물건이 없더라도 구경 삼아 시장에 나오면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지나 친척을 만나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들이 만나 시장이라는 공간에서 나누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혼담이었다.

혼인은 무턱대고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인연이나 계기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다른 마을에 살지만 같은 시장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만큼 큰 인연은 없었다.

시장은 또한 정치 공론의 장이기도 했다.

백성을 훈계하거나 설득하기 위한 조정을 방을 게시해 소식을 널리 전하기도 했고,

백성이 탐관오리를 비판하는 익명서가 나붙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3·1운동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으며, 태극기를 그려 넣은 격문이 게시되기도 했다.

소녀 유관순 열사가 태극기를 들고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곳도 천안 병천의 아우내 장터였다.

해방 이후에는 정파를 비난하는 전단지, 일명 삐라가 뿌려진 곳도 시장이었다.

이렇듯 사람이 많이 모이고 의견을 나누는 공공의 장소였기에,

나라에 중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서 시장이 움직였다.

이시 또는 사시라고 해서 가뭄이 들면 시장을 옮기는 것은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풍습이었다.

근검 절약하고 근신하는 마음으로 시장을 잠시 닫고,

작은 골목이나 다른 장소로 옮겨 최소한의 생필품만 거래해 하늘을 감동시키기 위해서였다.

비가 오고 난 후에야 시장은 본래 자리로 옮겨와 예전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물론 도성 주민들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이시는 18세기 이후 점차 사라였다.

왕실과 국가에 중대사가 발생하면 시장을 아예 닫고 영업을 하지 않는 철시도 단행되었다.

왕과 왕족, 그리고 주요 대신이 죽으면 애도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이성계에게 잡혀 참수를 당하자 "개경 사람들이 시장을 파하고" 슬퍼했다는 <고려사>의 기록도 있다.

일식과 우러식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도 시장을 닫았다.

또 철시는 정치적 항쟁의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 3·1운동 때 상인들이 점포 문을 닫고 휴업함으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1919년 일어난 3·1운동이 종로와 동대문 지역에서 활발했기 때문에,

이 지역 상인들이 철시하고 시위에 동참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황한 일제가 경찰을 동원해 강제로 가게 문을 열게 했으나 도통 소용이 없었다.

철시는 4월 중순까지 의연히 계속됐다.

이렇듯 시장은 민중의 가장 강력한 광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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