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벼슬 있는 거지
"평민이라도 기꺼이 덕을 심고 은혜를 베풀면 문득 벼슬 없는 재상이 되고, 사대부라도 헛되이 권세를 탐내고 총애를 팔면 마침내 벼슬 있는 거지가 된다." 명나라 때의 홍자성이 쓴 <채근담>의 한 구절이다. 홍자성의 잠언에 귀 기울이지 않아 생기는 일은, 즉 '벼슬 없는 재상'이 아니라 '벼슬 있는 거지'가 되는 일은 홍자성이 살던 명나라와 지구 정반대에 위치한 영국 런던에서도 넘쳐났던 모양이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익명의 후원자로부터 런던에서의 신사 수업에 필요한 후원금을 지급받고, 보잘것없는 시골 대장장이인 매부 조의 도제에서 일약 런던의 신사로 탈바꿈한 핍의 자아 각성 과정을 보여주면서, '벼슬 없는 재상', 즉 '신사'의 참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찰스 디킨스의 시대, 바로 산업혁명이 절정기에 다다른 시기 영국의 귀족층은 중산계급과 타협하며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려 했다. 대부분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지위를 얻은 경박하 중산계급은 당연하게도 금전적 지위에 걸맞은 품위를 갖지 못했다. 그러니 그들은 귀족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중산계급의 이상적 인간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바로 '신사'라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당시 신사가 되는 데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 신사가 갖춰야 할 내면적 덕성은 물질적 외면성의 부각으로 인해 그 비중을 잃어갔다. 돈이 신사를 만들었고, 그와 함께 신사개념은 속물화되었다. 우리의 주인공 핍 역시 신사 수업을 받으며 속물이 되어갔다.
벼슬 없는 재상
런던에서 신사 수업을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핍은 조가 방문할 거라는 소식을 듣는다. 이제 더 이상 자신과 격에 맞지 않는 대장장이의 방문이 핍은 탐탁지 않다. 마침내 조가 오기로 한 날, 조는 촌스러운 양복을 걸치고 나타나고, 핍은 그를 부끄러워한다. 만나는 내내 핍이 자신을 창피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눈치챈 조는 핍이 비틀린 신사가 되었음을 안타까워하며 작별 인사를 고한다. 아, 조는 얼마나 신사적인가> 얼마나 위엄있는가?
너와 난 런던에서는 함께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야. 사적이고 익숙하며, 친구들 사이에 잘 알려진 그런 곳 외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우리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야. 앞으로 넌 이런 옷차림을 하고 있는 날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텐데, 그건 내가 자존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저 올바른 자리에 있고 싶어서라고 해야 할 거야. 혹시라도 네가 날 다시 만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그땐 대장간에 와서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대장장이 조가 거기서 낡은 모루를 앞에 두고 불에 그슬린 낡은 앞치마를 두른 채 예전부터 해오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도록 하거라. 그러면 넌 나한테서 지금 이런 차림의 반만큼도 흠을 발견하지 못할 거다. 그럼 이보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겠네. 사랑하는 내 친구 핍, 하느님의 축복을 빌겠네!
막연하게 결정적인 유산 상속 시기만 기다리던 핍에게 어느 날 자신이어린 시절 탈옥을 도와준 죄수 매그위치가 찾아오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매그위치가 바로 자신의 익명의 후원자라는 것이었다. 매그위치는 온갖 고생을 다해 모은 재산으로 자신을 구해준 핍을 런던의 신사로 만들고 싶어 한 것이다. 호주로 추방된 그는 런던으로 돌아올 수 없는 죄수다. 죄수의 돈이라니! 핍이 그토록 바라던 '위대한 유산'이 욕된 유산이 될 판이었다.
소설 말미에서 핍은 매그위치를 도피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매그위치는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체포 과정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감옥에서 죽음을 맞는다. 매그위치의 재산은 몰수되고 핍이 그토록 바라던 막대한 유산은 물거품이되고 만다. 하지만 핍은 매그위치가 자기를 후원한 일의 가치를 인정한다. 매그위치가 자신에 대해 품은 기대와 마음이 선하고 은헤로운 자비였음을 깨닫는다.
비록 그토록 기다려온 유산을 잃어버렸지만, 핍은 도리어 그 유산을 잃어버림으로써 정말 로 '위대한 유산'을 되찾는다. 그 '위대한 유산'이 무엇인지는 핍이 고향 대장간으로 돌아와 조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목에서 독자도 알아챌 수 있다. 깊은 참회의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그에 대해 기꺼이 용서하는 것. 분노하지 않고 언제까지라도 믿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 그런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우정, 바로 이 위대한 유산이 조에게는 있었다.
그 후 11년 동안 핍은 스스로 노력해 재산을 일구고 굳이 신사라고 하면 신사라고 할 사람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베옷과 짚신'을 입고 신은 이들을 경멸하는 거짓 신사는 결코 아니다. '벼슬 있는 거지'도 아니다. 그가 영원토록 잃어버리지 않을 '위대한 유산'인 조와의 우정을 가슴속에 새긴 명예로운 신사가 된 것이다.